호스니 무바라크의 죽음을 보며 이집트 4대 대통령
이집트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날 터프릴 광장의 하디스에서 버거를 먹고 나왔는데, 검은 전경 수백 명이 왕좌의 게임에 나오는 무결병(The Unsullied)처럼 방패와 곤봉 같은 것을 들고 줄지어 반정부 시위대를 향해 이동하는 모습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시위대가 뭐라고 외쳐도 귀를 기울였다. 기후! 야호수님바라크! 장기 집권, 무능한 국정운영에 염증을 느낀 자들의 외침이었다.그러나 무바라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군인이었다. 현재의 현대 이집트(이집트 아랍공화국)는 군인들이 세운 나라다. 이집트 엘리트군 장교들(일명 자유장교단)은 1952년 쿠데타(혁명)를 일으켜 무능한 파르크 왕조를 폐위시키고 공화국을 세웠다. 이렇게 군인들의 손에 의해 지어진 이집트는 이후 무바라크까지 군인들이 집권해 왔다.(참고1) 무바라크는 부통령 시절 적국인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은 안와르 사다트가 1981년 반대 급진세력에 암살당한 뒤 이어 대통령이 되었다. 무바라크는 미국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며 무슬림형제단 등 반대 세력을 견제하며 정권을 유지했다.이스라엘-팔레스타인 협상에 기여해 국제적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지만 국내에서는 별 인기가 없었다. 이렇다 할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다. 대신 정부 보조금을 지급해 국민을 길들이게 하고 반대 목소리를 억눌렀다. 부정부패는 극에 달하고 빈부격차는 입만 열면 갈수록 벌어지고 서민만 죽어갔다. 그래도 공안을 통치하면서 좀도둑을 때려눕히는 바람에 외국인이 이집트에서 사는 것이 무바라크 시대만큼 좋았던 것도 없었다고 한다. 당시엔 그게 당연해 보이지만 2011년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이집트에 혼란이 오면서 이런 말이 나왔다.실제로 2007년 9월부터 1년 반 동안 카이로에 머물면서 치안이 안정됐다는 인상을 받았다. 가끔 홍해 다합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이집트 시내 산과 피라미드 등 주요 관광지의 치안은 안정적인 편이었다. 2007년 홍해의 다합, 플루가다, 샤름엘셰이크는 한국에도 널리 알려져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스쿠버다이빙을 즐겼다. 한국 민박집도 많이 생기고.그렇게 영원히 권좌에 있을 줄 알았던 무바라크는 2011년 2월 11일 한꺼번에 훅이 됐다. 튀니지에서 시작된 아랍 반독재 민중봉기가 이집트에까지 상륙한 것이다. 이집트의 군과 권력은 그대로였지만 무바라크는 민중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했다. 무바라크는 미국 프랑스 영국 등 서방 자유민주주의 진영과도 외교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어 그의 축출은 국제적으로 매우 큰 사건이었다. 이집트는 네 차례 이스라엘과 중동전쟁을 치른 나라로 아프리카 대륙과 지중해, 그리고 아라비아 반도 및 중동 지역을 잇는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었다. 냉전시절 미국과 소련의 쟁탈전이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다. 이 같은 나라 독재자 호스니의 예기치 못한 퇴진은 마치 나는 새가, 날아야 할 새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진 것 같은 충격이었다.특히 이집트라는 수천 년 전의 피라미드라는 불가사의한 거대 건축물을 가진 고대문명 고대국가라는 이미지 때문에 현대판 파라오의 몰락은 더욱 극적으로 세계에 비쳤다. 권력의 무상함, 무상함의 대표적 사례가 됐다.더욱이 무바라크가 축출되고 이집트 헌정사상 처음으로 민주적 자유 직선제가 실시되면서 첫 문민 대통령이 탄생했지만 이 대통령마저 집권 1년 만에 축출되는 영화 같은 일이 이집트에서 벌어졌다. 무르시 대통령이지만 그는 집권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지지기반인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의 입맛에 맞는 국정운영을 하면서 기존 세력층, 군부, 엘리트층, 세속주의, 기독교 진영의 큰 반발을 샀다. 이에 압델 파타 엘시시는 이런 세력층을 등에 업고 자신을 장관으로 임명한 무르시 대통령에게 반기를 들었고 마침내 축출에 성공했다. 군인들이 대통령에게 물러가라고 했으니 군사쿠데타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당시 대규모 민중집회가 타하리르 광장에서 벌어지고 있었고, 그 규모가 상당할 뿐더러 결과적으로 목적을 이뤄 정권창출을 했으니 혁명으로 명명할 이유도 상당하다. 이와 관련해 당시 민주적 쿠데타라는 제목의 칼럼을 쓴 바 있다. (참조 2). 현재 엘시시는 몇 가지 위기의 순간이 있었지만 2013년 무르시 축출 후 과도정부 위원장을 거쳐 선거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다시 이집트 정권은 군 출신이 쥐고 있는 셈(참고로 엘시시는 역대 지도자가 감히 하지 못했던 정부 보조금 삭감 등 파격적인 경제개혁 정책을 추진해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반대세력에 대해서는 강한 탄압을 가하고 인권면에서는 부정적인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오늘날 무바라크의 죽음으로 이집트 역사의 한 페이지가 삭제됐다. 그러고 보니, 2007년 스물여섯이었던 나도 어느덧 서른아홉이 되었다. 그때는 커다란 샌드백 같은 곳에, 1000페이지가 넘는 아랍어 사전에 1리터의 생수 페트병도 넣고, 하루 수 킬로를 걸어도 아무렇지도 않은 체력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이들이 자꾸 말하고 놓으면 "아 죽겠다"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배짱 큰 아저씨다.누구에게나 나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이집트는 내 나라, 또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처럼 세계인이 모두 관심을 갖는 나라를 제외하고 조금은 뒤에 있으면서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나라다.
그렇게 될지, 무바라크-무르시에 이어 7년째 이집트를 이끌 엘시시 대통령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집트는 나세르, 사다트, 무바라크 시대보다 더 잘사는 나라, 나라다운 나라가 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 참조 > 1 . http://blog.naver.com/jjostonebird/2208036033372 . http://blog.naver.com/jjostonebird/401925988053 . http://blog.naver.com/jjostonebird/220861834817